추웠던 날의 기억. 할말이많아요

060716 아무렇지도 않게 왜 그래? 랬었다.

laystall님 이글루에서 글을 읽다가 떠올랐다.

봄이었던가, 정확히 언제 쯤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. 다만 몹시 추웠던 것만 기억난다. 겨울인가 했는데- 가만히 생각해보니 봄이었나보다. 일교차가 심한 계절. 어느 날 저녁엔가, 집 앞에서 들었던 난데없는 고백. 전혀 생각도 해보지 못했던 뜻밖의 인물이라 적잖이 당황했었다. 긴장이 역력한 표정만큼은 생생히 기억난다. 했던말도 자꾸 반복하고,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, 말은 더듬더듬. 나 역시 조금은 당황했던 터라 무슨 이야길 늘어놓았는지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지만, 혼자 가슴에 담아두었던 이야기들- 나도 모르게 해버렸던 것 같다. 더듬더듬 힘들게 말을 이어가는 그 애를 보면서 나라도 뭔가 이야길 해야 할 것만 같았던 기분. 품에는 심부름을 다녀오던 계란 한판이 한 가득. 이젠 그만 집에 가보야 하는데- 끝날 줄 모르던 그 애의 이야기들.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, 싶다. 거의 두어시간 동안 붙잡혀서 쌀쌀한 봄밤의 날씨에 오들오들 떨던 나는 'Yes'라고 대답해버렸다. 동정심도 조금 들어있었을 거다. 그만 대화를 끝내고 싶었던 마음도 조금. 다 잘 되겠지-라던 너무도 안이했던 어린애의 마음이 한가득. 참, 어렸다. 아무것도 몰랐다. 단지 나는 그 이후 평소와 같지 않은 내 생활에 몹시 짜증이 나고 스트레스를 받았었다. 그럴 수 밖에 없으리란 걸 이해하질 못했다. 난 그애와 달리 친구들의 관심가득한 시선을 즐기지도 않았고, 친구들과 함께 지내던 시간에 조금씩 침범하는 그 애가 미웠다.

아마도 결정적이었던 것은 그 애가 만나자고 말했던 어느 봄 밤이었을거다. 나는 내 생활을 침해당했다-는 기분에 그 애에 대한 감정이 그리 좋지 않아졌을 때였고 불퉁하게 나타난 내게 쥐어주었던 분명 뜨거웠을 캔커피. 이미 미적지근해졌지만 아직 온기가 남아있던. 불퉁한 내 태도를 조금은 미안하게 만들었던. 하지만 그날은 정말 추웠다. 나는 얆은 봄옷차림이었고, 게다가 치마였다. 게다가 그 애의 이야기는 심지어 재미마저도 없었다. 말은 더듬더듬. 무슨 내용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, 무천 지루했고, 추웠던 기억만 가득하다. 눈에 띄게 덜덜 떨고 있는 내게 이제 그만 들어가보란 이야기조차 없었다. 마음 속으론 이 애가 나를 참 많이 좋아하나보다- 싶어서 그다지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하고 있던 내 속의 그애가 조금은 미안하기도, 아니 많이 미안했지만. 화가 났었다. 너무 추워서. 얆은 옷을 걸치고 덜덜 떠는 나를 보며, 춥지?라고 물으면서 이제 그만 들어가보란 이야기 한마다 꺼내지 않는 그 애에게 화가 났었다. 좋아하는 사람과 조금이라도 더 오래 함께 있고싶은 마음은 알지만. 조금 매정하게 조금은 미안한 어조로 그애의 말을 자르고 추워서 들어가보겠다고 했었던 것 같다. 서운한 눈치의 표정. 작별인사를 하고 등돌리고 돌아서서 혼자 얼마나 투덜댔었는지. 약간 남아있던 온기마저 다 식어버린 캔커피만 손 안에 덩그라니. 투덜대다가도 그런 내 모습을 조금은 미안하게 만들었던- 그 애의 진심.

생각해보면 우리 둘 다 많이 어렸고, 많이 서툴렀던 탓이다. 지금은 추억의 한 자락이 되어버린 이야기. 그 애는 또 어떤 모습으로 추억하고 있을까- 궁금해진다.

덧글

  • 피리아리아 2006/07/17 23:43 #

    ...과거얘기는... 생각해보면 씁쓸한 웃음이 남습니다..
    다행히.. 그쪽에겐 제가 원수가 아닌 과거 남자친구 정도로 남아있기에..
    다행이네요 ^^...
  • 도서관 2006/07/17 23:44 #

    저라면 추워하는 그녀를 안아줬을거에요. 단지 지금은 그래 줄 사람이 없지만. 문득 저도 어린 날의 이야기가 떠올라서 살짝 미소를 지었습니다. :)
  • laystall 2006/07/17 23:44 #

    맹렬히 비난하려 왔다가, 그 남자와 전혀 다를 것이 없었다는 죄책감에 젖어 돌아갑니다. orz
  • 새벽숲 2006/07/18 01:13 #

    좋아하는 마음을 표현하는게 서툴렀던걸까요.....어쩌면 그 남자분도 가끔 그 시간들을 생각할지도 모르죠. :-)
  • 미치르 2006/07/18 02:05 #

    피리아리아님/ 과거에 100% 만족하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? 돌이켜보면 항상 후회만 남습니다만 그래도 미소지을 수 있는 추억이 있다는 것에 감사해요. :)

    도서관/ 그..그건 너무 급전개의 상황입니다!!!! 우리 팀장님의 한마디 "가만보면 진도는 만날 저 혼자 나가. (꿍얼꿍얼)"

    laystall님/ 후후.. 확실히 국밥집은 심하셨어요(...) 하지만 그 분도 저처럼 웃으면서 추억하시지 않을까요? ^^

    새벽숲님/ 저도 서툴렀던 건 마찬가진걸요. :) 좀 더 솔직하게 내 감정 이야기 하고, 좀더 이해하려 했더라면 좋았을 텐데- 아쉬움이 남는답니다. 뭐..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이 어딨겠어요~ ^^;;
  • 곰씨 2006/07/23 11:28 #

    나도 그때 살짝 들었던 기억이 있는데, 아른아른하네'ㅂ'
    그때는 내가 제일 큰줄 알았는데, 지금 생각해보니 너무 어리다.
    즐거운 추억으로 남기자구^-^
    나는 그렇게 아련하게 남길 수 있는 추억이 있다는 것만도 너무 부럽다... OTL
  • 미치르 2006/07/23 11:35 #

    곰씨/ 그 땐 참..불안해하면서도 스스로에게 자신감 차있었던 것 같아. 무슨 똥배짱인지..후후. 반면 지금은 내가 너무 작게만 느껴져서 막막하다.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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